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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 철학사 37 : 미쉘 푸코(1926~1984)
    서양철학사 2022. 2. 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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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쉘 푸코(1926~1984)

     

     

      프랑스의 현대 사상가로, 권력과 지식의 연계론을 통해 끊임없이 권력의 구조를 분석하고 권력 비판을 전개했다. 또한 이론과 실천을 겹미한 지식인으로서 정치 이념에 휘둘리지 않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핍박에 거세게 저항했다. 사상 측면에서는 구조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포스트 구조주의 철학자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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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스테메 : 학문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우리가 배우는 학문은 시대와 함께 변화해 왔다. 따라서 늘 같은 것을 배우고 또 가르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서 새로운 교육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문은 어떻게 진화하고 있을까? 이 물음에 학문적인 답을 개척한 철학이 미쉘 푸코의 '에피스테메(episteme)'라는 개념이다.

      에피스테메는 원래 그리스어로 학문적 인식, 즉 지식을 일컫는다. 예를 들면 플라톤은 이성을 이끌어 내는 지식을 에피스테메라고 하며, 단순히 주관에 지나지 않는 '독사(doxa, 억견)'와 대비시켜 생각했다.

      반면에 푸코는 [말과 사물]이라는 저서에서 독특한 앎의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로 에피스테메를 사용했다. 말하자면 푸코가 주장하는 에피스테메는 개별 지식의 이야기가 아닌, 해당 시대의 모든 학문에 공통된 앎의 토대, 지식의 틀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앎의 토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앎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공통된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하나의 경과된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다. 달리 표현하면 앎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틀이 필요하다. 실제 학자들이 동일한 대상을 오랜 시기에 걸쵸 연구할 때, 시대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다. 지식이란 세계의 틀에 영향을 받고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푸코는 에피스테메를 시대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했다. 이에 따르면 같은 학문이라도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

      16세기의 르네상스 에피스테메, 17~18세기의 고전주의 에피스테메, 19세기의 근대 인간주의 에피스테메, 앞으로 나타날 에피스테메까지, 21세기인 지금 시각으로 보면, 네 번째 에피스테메는 인터넷에 영향을 받는 지식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지식이나 학문을 마치 보편적이고 연속된 것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하지만 학문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시대의 제약을 강하게 받는다. 요컨대 앎의 토대가 되는 에피스테메가 변하면 그에 따라 새로운 에피스테메로 규정된 새로운 학문이 구측되는 것이다.

      이처럼 지식은 개개인의 이성보다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인식의 틀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자각한다면, 깊이 있는 학문 탐구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이리라.

     

     

    파놉티콘 : 우리는 왜 규칙을 지키는가?

     

      왜 우리는 법규를 준수하고 엄격한 규율을 지킬까? 물론 강제성이 있는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학교에서 또 직장에서 우리는 누가 보지 않더라도 규율에 따라 생활핳 때가 많다.

      여기에서는 푸코의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개념을 통해 규율의 실체를 파헤쳐 보자.

      파놉티콘은 한곳에서 모두 볼 수 있게 만든 '원형 감옥'을 뜻한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감옥 시스템으로 중앙에 원형 감시탑이 있고 그 감시탑을 에워싸며 수감자들의 독방이 둥글게 들어서 있다. 그리고 중앙의 감시탑에서는 감옥 전체를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지만, 수감자 쪽에서는 중앙의 감시탑을 확인할 수 없다. 즉 중앙 감시탑에 있는 감시자는 모든 수감자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감시할 수 있지만, 독방에 갇혀 있는 수감자들은 감시자가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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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는 원형 감옥에 주목한 이유는 감시하는 사람과 감시당하는 사람 사이에 눈높이의 불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불균형이야말로 권력의 상징이다. 한쪽이 다른 쪽에 완전히 복종하게 되는 구도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파놉티콘에서는 수감자 스스로 자신이 늘 감시당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한다. 바로 '종속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로써 수감자는 감시자가 바로 옆에서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결과적으로 권력은 개인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어 익명화됨으로써 더 교묘하고 치밀한 효과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파놉티콘의 원리에서 엿볼 수 있는 규율의 권력 작용이 단순히 감옥이라는 제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근대 사회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고 말한다. 이 원리는 학교, 공장, 회사, 병원, 군대 등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장소로 확신해 감옥과 흡사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으며, 사회 질서의 형성과 유지라는 측면에서 막강한 임무를 맡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규율은 개인의 신체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관통해 규율 사회를 양산하게 되었다.

      결국 푸코가 밝히고자 한 바는 단순히 새로운 형벌의 방법이 아니라, 권력을 통한 관리의 대상이 신체에서 정신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눈에 보이는 드러난 권력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 더 무시무시하고 더 무자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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