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공자(B.C.551~B.C.479)
    동양철학사 2023. 2. 3. 18:04
    728x90
    반응형
    SMALL

    공자(B.C.551~B.C.479)

    공자(B.C.551~B.C.479)

    공자의 삶

    사마천은 그가 쓴 <사기>에서 중국 천하를 떠돌아 다니며 유세하는 공자를 가리켜 '상갓집 개'라고 불렀습니다. 밥을 주는 사람은 있어도 돌아갈 집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공자의 이름은 구요, 자는 중니로서, 노나라의 평창향 추읍(지금의 산둥성 취푸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딸만 내리 아홉을 낳던 그의 아버지 숙량홀은 나이가 들어, 젋은 여자와 정식 결혼은 하지 않은 채 공자를 낳았다고 합니다.

     

    숙량홀은 키가 열 척이나 되고 힘이 장사였는데, 공자의 외할아버지 안씨도 딸에게 결혼하기를 종용하면서 그의 늠름한 대장부의 기상이 부럽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무용담 중에는, 노나라의 군대가 성 안에 포위되려는 찰나 그가 위로부터 내리 닫히는 성문을 두 손으로 떠받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나이 세 살 때 부친이 돌아가셨고, 그는 결국 어머니의 슬하에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공자의 할아버지가 살던 곳에 장사지냈고, 계절에 따라 집에서 정성껏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항상 관심있게 봐오던 공자는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제기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는 늘 예절의 자세를 갖추었기 때문에 매우 어른스럽게 보였다고 합니다.

    어진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한 공자는 열아홉 살에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까다로운 성미를 견디지 못하고 아내는 도망쳐 버렸다는 설도 있습니다.

     

    공자는 낮은 벼슬에서부터 출발하여 차츰 신임을 얻었고, 마침내 대사구라는 높은 벼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권을 담당한 자가 너무 무능한데 대해 실망하였고 또 반대파의 장난도 있어서, 결국 쉰여섯리 되던 해에 벼슬에서 떠나고 말았다. 그는 일반 백성들을 올바르게 인도하여 정의로운 정치를 실현해보고자 했으나, 이웃 나라의 왕이 충돌질하는 바람에 노나라 왕은 공자가 시행하는 정치 방식을 없애버렸습니다.

    14년 동안이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세하다가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한편, 유가의 경전을 정리하고 편찬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자기 집을 서당 삼아 역사와 시와 예의범절을 가르쳤던 그능 삼천 명 이상의 제자를 길러냈고, 그렇게 해서 육예에 통달한 사람만 해도 일흔 두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오경을 비롯한 저서의 집필에 전념하다가 일흔 세살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시체는 성대한 장례 절차를 거쳐서 성북 수수 근처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역경>(주역), <시경>, <서경> 등 이른바 삼경이 있으며, 여기에 <춘추>와 <예기>를 합쳐서 흔히 오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밖에 사서라 불리는 <논어>, <대학>, <중용>, <맹자>가 있습니다.

     

    극기복례 & 살신성인

    흔히 세계 4대 성인 중 석가모니는 자비를, 예수는 사랑을,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공자는 '인'을 가장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말할 것도 없이, 인이야말로 공자 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최고의 경지입니다. 그러나 과연 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공자 자신도 인에 대해서 때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인이란 인간 중심의 사상입니다. 즉 인이란 모근 일의 주체인 인간에게 인간다운 인간이 되게 하는 '휴머니즘'과 다르지 않습니다. <논어>에 보면,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공자는 "우리가 인간을 섬기는 일도 다 못하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느냐?"라고 되묻습니다.

     

    둘째, 인은 진실함과 성실함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이에 공자는 "기교 있는 말이나 좋은 낯을 꾸미는 자는 인이 적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거짓으로 낯을 꾸미고 현란한 말로 사람을 속이는 일은 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문 밖을 나서서는 큰 손님을 만난듯이 하며, 백성 부리기를 큰 제사 받들듯이 하고,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셋째, 인의 경지는 끊임 없는 자기 노력에 의해 달성됩니다. 인이란 욕망에 빠지기 쉬운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예절로 돌아가는 것(극기복례)입니다. 욕정에 빠진 육신을 죽이고 인을 이루기 위해서는, 즉 살신성인하기 위해서는 끊임 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공자는 자신이 걸어온 구도의 과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 살에 바로 서고, 마흔 살에 의혹하지 않고, 쉰 살에 하늘의 법칙을 깨닫고, 예순 살에는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으며, 일흔 살에는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자처럼 역사상 보기 드문 위대한 인물도 열다설 살부터 학문을 연구하고 스스로 수양하기 시작했지만, 결국 일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성인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공자는 인을 실천한 역사적 인물로 미자, 기자, 비간 등 3명을 듭니다. 이들은 은나라 주왕의 음란과 폭정에 대하여 서로 다른 방법으로 간언을 했습니다. 먼저 미자는 제기를 가지고 미나라에 가서 종사를 보존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기자는 미친 사람으로 변장하여 노예들 틈에 숨어 있다가,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의 왕으로부터 조선의 왕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비간은 끝까지 남아 극간을 올렸고, 이에 왕은 "성인의 가슴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하더라."라고 비꼬면서 그를 찢어 죽였다고 합니다.

    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백성을 구하려는 마음에서는 이들의 의도가 서로 같았기 때문에, 공자는 이들을 살신성인의 모범이라고 보았습니다.

     

    군자와 소인의 차이

    유교 철학의 특성은 인간과 그의 실천적 생활에 모든 관심을 기울인다는 데 있습니다. 귀신에 이어 또다시 죽음에 대해 묻는 계로에게, 공자는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에 대해서까지 알 수 있겠느냐?"라고 답하였습니다. 여기에서고 그의 관심은 인간의 삶에 집중되어 있었음이 증명됩니다. 이에 따라 그가 이상으로 삼은 인간 역시 현세 도피적이거나 금욕주의적인 성인이 아니라, 세계와 사회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모든 일에 절도를 지킬 줄 아는 명석한 판단력의 소유자, 즉 현자(군자)였던 것입니다.

     

    그가 교육의 대상으로 삼은 계층 역시 일반 서민이나 지배 왕족이 아닌, 당시 신흥 선비였습니다. 공자는 이러한 신진 엘리트가 현실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제후국의 정치를 내부로부터 개혁하고,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며, 또한 백성들의 복리를 증진해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렇다면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물인 군자와 그 반대편에 서있는 소인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군자는 '의'를 밝히는데 반해, 소인은 '이(리)'를 밝힙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군자는 먼저 이 일이 의로운 일인지 아닌지를 생각하는데, 소인은 이 일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아니면 손해가 되는지를 따집니다.

    둘째, 군자는 두루 사귀지만 편중되지 않고, 소인은 편당하여 두루 사귀지 못합니다. 군자는 여러 사람과 거리낌 없이 교제를 나누면서도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데 반해, 소인들은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몰려 다니면서 나쁜 일만 도모하다 보니 평범한 이웃 사람들조차 외면합니다.

    셋빼, 군자는 화목하나 같지 않고, 소인은 같으면서도 서로 불화합니다. 군자는 각자 나름대로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되 쓸데없는 욕망을 버려서 화합하지 않을리가 없는데, 소인들은 도토리 키재기와 같은 모양새이면서도 서로 욕심을 내다보니 그 안에서조차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싸우기 일쑤입니다.

    그밖에 공자가 생각하는 군자란, 외적인 형식과 내적인 곧은 마음이 일치하여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인간을 말합니다. 즉 밖으로는 세상의 법과 예절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안으로는 도덕법칙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군자인 것입니다.

     

    백성의 마음을 얻을 것!

    진정한 의미에서 인이란, 한 사람의 도덕적 완성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을 모아 커다란 인, 즉 대동인을 이루는 것이 유교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자는 올바른 정치를 주장한 것입니다.

     

    첫째, 통치자(군자)는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닦고 나서 가정을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리고 난 뒤에야 나라를 다스리고,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 자신의 몸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인격을 갖춘 다음에 식구를 가르칠 수 있고, 식구를 가르치는 일에 성공해야만 남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남을 가르치고 나서야 비로소 한 나라를 책임질 수 있으며, 한 나라를 충분히 책임지는 상태에서 세계를 다스리겠다고 나설 수 있는 법입니다.

     

    둘째, 통치자는 항상 백성의 마을을 얻어야 하는데, 민심을 얻으면 나라를 얻게 되고, 민심을 잃으면 나라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통치자가 백성의 마음을 얻으려면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면 안된다. 백성들이 오른쪽으로 가자 하는데 왼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자 하는데 오른쪽으로 간다거나 하면 안 됩니다. 

    반응형

    셋째, 한 나라에 진정으로 도덕 정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 윗사함과 아랫사람이 각각 자기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가령 임금은 백성을 널리 사랑하고, 신하는 임금을 공경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는 자식을 너그럽게 사랑하고, 국민에 대해서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백성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급급한 지도자가 나와서도 안 되고, 나라의 지도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백성들이 있어서도 안 되며, 돈 몇 푼 때문에 부모를 학대하는 자식도 없어야 하고, 자기가 낳은 자녀를 무책임하게 내팽기치는 부모가 있어서는 안 되며, 서로 믿지 못해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넷째, 통치자는 국민의 진정한 발전이 다만 물질의 풍부에 있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의가 실현되는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덕이란 가장 중요한 근본이요, 반명 재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근본적 덕을 소흘히 하고 말단인 재물을 소중히 하면 백성들이 재물을 많이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게 됩니다. 그러므로 재물이 모이는 곳에 백성의 마음이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는 곳에 백성들의 마음이 모이게 됩니다. 물질을 숭상하고 마음의 도덕성을 소홀히 여기면, 반드시 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몸으로 보여주는 교육

    공자는 교육이 나라와 사회를 보존하고 이를 발전시키는데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요구했습니다.

     

    첫째,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교육을 베풀라고 요구했습니다. 신분이 높든 낮든, 혹은 재산이 많든 적든 간에 모든 사람이 동일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또 공동의 교육 시설을 늘리고 개선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공자가 죽은 다음에도 수백 년 동안 중국 교육제도의 근본을 이뤄왔습니다.

     

    둘째, 공자가 강조한 교육은 앵무새처럼 단순히 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습을 통해 예술적 감각을 기르게도 했고, 예절과 풍습을 몸에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예의범절은 사람의 겉모양을 꾸미는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해로운 행위를 하지 않도록 마음 속의 억제 기능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또한 배우기를 적극 권했던 것입니다.

    SMALL

    또한 공자의 교육 방법은 교실에서 말로 전하는 것보다는, 가르치는 사람이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선생인 그를 실제로 모시고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공자 스스로 말과 몸가짐 하나하나 제자들 앞에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일종의 시범교육을 행했다고 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공자는 일하지 않는 인간,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 인간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내가 하루종일 깊이 생각해봤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너희는 정 할 일이 없거든 멍청하게 잡담이나 하지 말고, 장기 바둑이라도 두어라."라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다중인격의 성인

    공자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예순 여덟에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고, 2년 후에는 아끼던 제자 안연깢 죽었을 때, 그의 죽음에 이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외쳤다고 합니다.

    "하늘이 나를 죽이는구나! 하늘이 나를 죽이는구나!"하며 자기 아들의 죽음보다 더 슬퍼했습니다. 이어 다음 해애는 재아가 제나라에서 죽임을 당했고, 그 다음 해에는 그를 가장 믿고 따르던 자로마저 전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로는 위나라에서 무참히 살해되었고 그 시체가 항아리에 젓갈로 담겨져 공자에게 보내졌습니다. 이런 절망 적인 상황 앞에서 그는 마치 양팔이 잘려나간 듯 몸부림쳤다고 합니다.

    "하늘은 내가 빨리 죽기를 재촉하는구나! 하늘은 빨리 죽기를 재촉하는구나!"

    얼마 후에 자공은 아침 일찍이 공자에게 문안드리러 갔습니다. 공자는 지팡이를 든 채 문 앞에서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공자는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도 부러지는구나, 철인마저 시들어 버리는구나!'라고 탄식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눈물을 줄줄 흘렸는데, 자공이 급히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가 눕혔으나, 공자는 그날부터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레 만에 제자들의 비통 속에서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때 공자의 나이 일흔셋이었습니다.

     

    공자가 죽은 후 그는 성인으로 추앙되었고, 그 명예는 이천 년이나 계속 누려왔습니다. 그의 사원은 곳곳에 건립되었고, 12세기 초에는 신으로까지 추대되었습니다. 단순히 인간이기를 원했으며 스스로 성인이 될 수 없다고 말했던 그가 결극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논어>에서 결코 완벽한 인간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제자의 항의에 쩔쩔매며 변명하는 스승이었고, 낮잠을 잔 제자에게는 '더 이상 손댈곳도 없는 인간!'이라며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제자 안연이 죽었을 때는 자기가 그토록 강조한 예법을 어긴 채 소리 내어 통곡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상복 입는 기간을 일년으로 줄이자고 제안하는 제자에게 "자네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라고 해놓고선, 그 제자가 나간 뒤에 다른 제자들에게 그를 비난하기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음식은 까다로운 편이었고, 술은 아무리 마셔도 정신이 혼란해지지 않았습니다. 옷의 색깔과 품위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오른쪽 소매가 짧은 작업복을 직접 만들어 입기도 했습니다. 관청에 나가서 일할 떄는 윗사람에게 온순하고 아랫사람에게 엄격한, 다중인격자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의 언행을 전하는 <논아>에 의하면, 물론 그는 덕스러운 군자이며 좋은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유교를 '봉건사상의 찌꺼기'로 보는 시각도 있고, 아편 전쟁 이후에는 '유교가 중화민족을 망쳤다'며 '공자의 교를 타도하자'는 외침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오랜 세월 동안 중국뿐만 아니라 동양, 더 나아가 전세계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동양철학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자(B.C.298?~B.C. 238?)  (16) 2023.02.09
    맹자 (B.C.372 ~ B.C.289)  (6) 2023.02.06
    중국 상고 시대의 신화  (20) 2023.02.02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