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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철학사 3 :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32)
    서양철학사 2022. 1. 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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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논리학, 자연학, 철학, 윤리학, 정치학 등의 학문을 집대성해 '학문의 제왕'으로 칭송된다.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형이상학의 체계를 완성했다. 플라톤을 이상주의자라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4원인설 : 사물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사물은 어떻게 발전해 나갈까? 꽃은 어떻게 피고, 집은 어떻게 완성될까? 이런 문제를 깊이 파고들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은 길잡이가 되어 준다.

      4원인설에서 '원인'이란 그리스어로 '아이티아(aitia)'라고 한다. 아이티아는 원래 '무엇에 대한 책임'을 뜻하는 단어로, 이 세상 모든 것에는 그것이 생기는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 포함된 말이다. 마치 불이 없는 곳에 연기가 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불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만물의 근원, 즉 '아르케(arche)'의 하나로 포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이 생기고 존재하는 원인으로 다음 네 가지를 꼽았다. 사물을 생성하는 바탕, 이른바 재료가 되는 '질료인', 사물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형상인', 사물을 생겨나게 하는 '동력인', 사물의 최종 목표인 '목적인'이다. 그는 모든 사물에는 네 가지의 원인이 필요조건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인공물뿐 아니라 자연물까지도 4원인설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리스터텔레스가 사물을 운동의 과정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는 4원인설 가운데 동력인을 흔히 '운동인'이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더욱이 여기에서 말하는 운동이란 사물의 이동에서 머물지 않고, 성질의 변화도 아우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씨앗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는 일련의 변화 과정도 운동으로 파악했다.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4원인설을 집 짓기에 적용해 보자. 건축 재료는 질료인, 설계도는 형상인, 실제 집을 건축하는 행위는 동력인, 최종 건축물은 목적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요컨대 처음 질료인이 집짓기의 1단계, 형상인이 2단계, 동력인이 3단계, 마지막으로 목적인이 4단계가 되는 셈이다.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으로 나타낸다면 '재료→구상→실천완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의 생성과 발전을 모두 4원인설로 규명했다. 그만큼 스스로 자신의 이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에 내재한 가능성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는 질료인이 형상인이나 목적인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사물의 근원을 분석할 때 4원인설은 분명 참고할 만한 개념이다.

     

    좋음 : 최고의 선택이란?

     

      우리는 늘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점심 메뉴 고르기부터 직업 선택과 같은 중요한 문제까지, 살면서 다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잘목된 선택으로 후회할 때가 부지기수다. 어떻게 하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선택의 갈림길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결정 장애 세대에게 길잡이가 될 만한 철학 개념이 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golden mean)'이다.

      중용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동양 사상에도 등장한다. 중국의 고대 사상가 공자가 주장한 중용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절한 태도를 유지함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메소테스(Mesotes)'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도 중용이라는 단어로 옮길 수 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이란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중용은 '훌륭한 인간의 덕'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중용과 관련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공포, 자신감, 욕망, 분노, 동정심 등에 대한 쾌 혹은 불쾌를 지나치게 느낄 때도 있고, 지나치게 간과할 때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극단적인 감정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쾌 혹은 불쾌를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물에 대해, 적절한 사람을 향해, 적절한 동기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느끼는 것이 중용임과 동시에 최선이며 이를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양극단의 한 가운데, 중앙이 바로 중용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만용과 비겁의 가운데는 용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사치와 인색의 중간은 절제, 추종과 무관심의 중간은 호의, 비하와 자만의 중간은 성실이 된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이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감정을 극단으로 치우치게 하는 일은 간단하다. 누군가 자신을 비하하면 한없이 실망하고, 반대로 칭찬하면 목에 힘을 주고 자만하면 된다. 이때 누군가 비하와 자만의 중용을 지키기 위해 '성실하게 행동하세요'라고 조언한다면 어떨까? 이를 받아들여 행동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래도 인간은 어느 한쪽으로 쉽게 치우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중용의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들을 때는, 물 해도 안 된다며 낙담하지 말고 나에게는 장점이 있다고 믿자. 아울러 장점만 생각하는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의 단점도 받아들이자. 이렇게 중간 상태를 모색함으로써 우리는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자, 이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지 명확해지지 않았는가. 인생의 결정을 앞두고 고민할 때, 중용인 지점을 찾아내 선택한다면 분명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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